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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원과 종산초등학교 // 중앙초등학교는 1917년 진남관에서 시작한 여수수산학교(지금 여수대학교)가 건물을 지어 1924년부터 1944년 11월 국동으로 옮겨가기 전 까지 처음 학교로 사용하였다. 해방이 되면서 1940년 설립되었던 봉산동의 서국민학교부설 구봉간이학교가 교사가 비좁고 부족하여 잠시 진남관을 학교로 사용하다가 1946년 9월 1일 지금의 자리로 옮겨오면서 학교 명칭을 종산국민학교로 바꾸었다. 1948년 10월 19일 여순사건이 일어난 후 일 주일 후인 10월 26일 진압군에 의해 군인들의 반란이 진압되자 여수경찰서와 가까이 위치한 이유로 수도경찰과 전남과 여수경찰서 특수대가 국방경비대 군인들과 함께 이 학교에 주둔하였다. 10월 28일부터는 소위 가담자 색출이라는 이름으로 여수와 인근 읍면 지역에서 끌려온 혐의자를 팬티만 입힌 채 10명씩 포승줄로 묶어 12월 중순까지 수용하였다. 특히 마산 5연대장이었던 김종원은 혐의자로 끌려온 민간인을 대상으로 취조를 하는 과정에서 재판과정 없이 즉결처분을 하였는데 권총으로 사살하거나 일본도로 목을 치는 광란적인 학살의 만행을 아무런 제지도 없이 공포 속에서 지켜보아야만 했다. 일본군 하사관 출신이었던 김종원은 여순사건 이후에도 거창양민학살을 주도하였고 장면부통령 암살의 배후로 구속되는 등 만행을 일삼다 1960년 병으로 사망했다. 여순사건과 관련 재판과정도 없이 학살되어 암매장되거나 집단학살 된 만성리의 학살, 민드래미 골짜기 학살, 호명과 봉계동 학살도 모두 이 학교에 수용되었던 혐의자를 대상으로 하였으며 아직까지 그 규모와 내용이 밝혀지지 않은 채 통한의 세월이 반세기가 넘게 흘렀다. 이 학교의 현재의 이름인 중앙초등학교는 여순사건 후인 1951년 9월 1일부터 사용하게 되었다.

▲ 부역자 심사와 서초등학교 // 여순사건이 일어난 후 여수 시내지역의 진압이 완료되면서 경찰과 진압군은 시민들을 가까운 학교 운동장으로 모이게 하였다. 공포를 쏘고 총구를 가슴에 들이대면서 집집마다 수색을 하며 내몰아대는 군인들에게 숨도 크게 쉴 수 없는 공포가 밀어닥쳤다. 동정은 공설시장과 동국민학교, 중심지는 종산국민학교, 진남관, 서정은 서국민학교로 집결하였으며 미평과 국동에서도 학교와 넓은 공지로 모였다. 전 시민을 대상으로 여순사건 동조자를 심사한다고 하면서 우익과 경찰이 길게 늘어선 인간터널을 통과하게 하였다. 눈을 감고 통과하는 인간 터널에서 누구라도 손가락질을 하면 따로 분류되었다. 이 들 중 일부는 학교 뒤에 파 놓은 구덩이 앞에 서게 한 후 총살형도 서슴치 않았다. 외국의 기자는 공포에 휩싸인 이 장면을 보고 너무 공포에 질려 울부짖음도 잃어버린 이 광경을 침묵의 도시라고 하였다. 지까다비를 신고 있는 사람, 총을 멘 흔적이 있는 사람, 군용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도 우익인사와 경찰의 손가락 총으로 지목된 사람과 함께 모두 따로 분류되어, 운동장에 길게 만들어진 행렬의 좌우로 구분되면서 살자와 죽을 자로 따로 나뉘어졌다. 27일 전 시내가 함포사격과 진압군의 방화로 불타고 있음에도 흐르는 눈물에 발만 동동구르며 소리한 번 질러보지 못하고 지켜보아야만 했다. 왜적의 침입에도 나라를 구하며 지켜내고 일제36년도 당당히 견뎌내었던 여수시민이 어느날 갑자기 영문도 모르채 모두가 죄인이 되어있었던 것이다. 이틀을 이렇게 학교 운동장에서 보낸 시민들 중 일부는 즉결처형으로 죽임을 당하고 부역혐의자로 분류된 사람들은 종산국민학교로 압송되어 풀려난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교도소로 보내지기도 하고 학살되기도 하였다.

▲ 호명동 암매장지 // 종산국민학교에 수용되었던 부역자혐의자 중 일부를 야음을 틈타 인적이 없고 후미진 호명동 야산 일대에 끌고 가 며칠에 걸쳐 학살을 하였다. 사건 후에 이 일대를 지나는 사람은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을 하였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짐작이 된다. 90년대 초 이 일대의 도로공사 중에 많은 수의 유골이 발견되었고 1998년과 1999년 2회에 걸친 「여수지역사회연구소」의 '여순사건 암매장지 유골발굴'에서도 5구이상의 유골이 발견되었으며 한 구의 두개골에선 총으로 사살된 것을 증명하는 실탄구멍을 뚜렷하게 보여주었다. 가까운 둔덕동 용수부락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지나간 트럭과 실려 간 사람들을 보았을 때 호명동 야산에서만 100여명 이상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여수의 암매장지는 재판의 과정 없이 불법적으로 이루어진 야만적인 학살로 호명동 외에도 봉계동의 큰골과 작은골, 민드래미 골짜기, 만성리 골짜기 등에서 이루어졌으며 반세기가 넘은 지금까지도 묻혀있어 희생자에 대한 신원과 규모를 정확히 모르고 있다.    

▲ 14연대터 // 이 곳은 여순사건을 일으켰던 14연대 병사들이 생활하던 병영이 있었던 곳이다. <봉양>, <물구미>, <신근정>이란 3곳의 마을이 있었으나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 일본 해군이 가막만과 뒷산의 지형이 천연 요새를 이룬 이 곳에 해군 수상비행장을 건설하기 위해 주민을 강제 이주시켰다. 지역민을 동원 근로보국대라 하고 비행장을 건설하다 완공직전 일본의 패망으로 빈 막사와 격납고만 남아있던 곳을 미 군정이 인수하게 되었다. 1948년 5월 4일 정부 이양과 함께 군사용지로 편입되어 광주 4연대에서 분리된 안영길 대위 이하 1개 대대병력이 14연대를 창설하여 초대 연대장 이영둔 소령이 부임하였다. 이어 김익렬 중령, 오동기 소령을 거쳐 박승훈 중령이 연대장이던 1948년 10월 19일 제주 4.3을 진압하라는 제주출병 명령을 거부하는 연대 선임하사관 지창수 상사의 지휘로 회식 중이던 장교들을 사살하면서 사건이 시작되었다. 사건 후 1950년 7월 25일 군대가 완전 철수하고 1952년 12월 31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제 15육군병원이 설치되었으며 1962년 6월 26일부터 1976년 2월 20일 까지는 보사부 결핵환자 자활 촌으로 지정되었었다. 1976년 7월 23일부터 지금 까지는 한국화약 공장이 들어서 가동 중인 이곳은 평화로운 마을을 강제로 이주시킨 일본에 의해 건설되고 미군이 이어받았으며 군인들의 병영에 이어 화약을 만들고 있는 현재까지 한국의 가슴 아픈 현대사와 질곡을 같이하고 있는 비극의 터이다.

▲ 만성리 형제묘 // 터널 가까이 있는 만성리 학살지와 함께 알려진 이 곳 <형제묘>는 학살 후 시신을 찾을 길없던 유족들이, 죽어서 형제처럼 함께 있으니 <형제묘>라 하자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여순사건의 부역혐의자가 되어 종산국민학교에 수용되었던 사람들 중 125명이 1949년 1월 13일 이 자리에서 총살되고 불태워 졌다. 당시 여수 경찰서 사찰계 형사였던 최모씨는 학살현장을 직접 지켜보았던 사람으로 5명씩 포승줄로 묶여서 끌려온 사람들을 총살 한 후에 5명씩 장작더미에 눕혀서 5층으로 쌓은 큰 더미가 5개나 되었으니 125명이라는 이야기를 여수지역사회연구소의 조사 시에 증언하였다. 처형은 헌병들이 주도하였으며 장작더미에 기름을 부어 불을 태웠고 처형된 가족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보초를 세우고 태워진 시신위로 큰 바위를 굴려서 덮었다. 시신은 3일간이나 불에 탔으며 코를 찌르는 지독한 냄새는 한달이 넘도록 계속되었다. 잡혀있던 사람들이 처형되었다는 사실이 소문으로 알려지자 생사가 궁금하던 많은 가족들이 학살지와 가까운 산위에 숨어서 불타는 시신을 바라보았지만 서슬 퍼런 군인들이 지키는 현장을 애끓는 심정으로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 부역자 심사와 서초등학교